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문단 편집) === 몽골의 지배자 === 콜차크가 패배하고, [[시베리아 출병|시베리아의 일본군]]도 철수하기로 하면서 [[그리고리 세묘노프]]는 적군을 피해 [[만주]]로 후퇴하려 했다. 하지만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하여 1920년 8월 7일 세묘노프를 배신했다. 세묘노프는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한 뒤, [[만주국]]에 정착했다가 [[소련군]]에게 붙잡혀 1946년에 처형당했다. 그리고 사단을 이끌고 외몽골의 수도 우르가(현 [[울란바토르]])로 향했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도시를 점령한 중국군에게 무장해제를 요구했으나 거부되었다. 10월 26일에서 11월 4일간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우르가를 공격했지만 큰 피해를 입고 패퇴했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외몽골 동부 케룰렌 강 상류로 후퇴했다. 중국으로부터 독립하고 싶어한 몽골인들은 운게른슈테른베르크에게 협조했고, 특히 [[복드 칸]]은 밀서를 보내 직접적으로 도움을 청했다. 해가 바뀌어 1921년 1월 31일,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부대는 우르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아시아 기마사단 병력은 1,460명. 우르가에 주둔한 중국군은 7,000여 명이었다. 전투가 진행되는 와중 다민족 혼성부대가 유폐된 복드 칸을 구출했다. 2월 4일 마침내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우르가를 함락시켰다. 중국 측 장교들과 공무원들은 이미 2월 3일 부하들을 버리고 도망갔다. 한편 적군 지지 성향 러시아인들도 중국군을 따라 도망갔다. 이 전투에서 중국군은 1,500여 명, 운게른슈테른베르크군은 60여 명 사망했다. 전투 이후 운게른슈테른베르크 부대는 중국인 상점을 약탈하고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약탈이 끝난 뒤 레오니트 시파일로(Леонид Сипайло, Leonid Sipailo) 대령이 [[비밀경찰]]을 조직해 '빨갱이'들을 수색해 죽였다. 그 뒤 다른 지역의 중국군들은 운게른슈테른베르크가 공격해 오자 싸우지도 않고 도망가 버렸다. 1921년 2월 21일, 운게른슈테른베르크와 몽골 귀족들은 복드 칸을 우르가로 모셔왔다. 중국군을 몰아내준 보답으로 복드 칸은 운게른슈테른베르크에게 "다르칸 호쇼이 친왕" 작위를 수여했다. 한편 세묘노프는 우르가 점령의 공을 사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계급을 중장으로 높여 주었다. 1921년 2월 22일, 복드 칸과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외몽골이 독립 군주국임을 선언했다. 폴란드 모험가이자 작가인 페르디난트 안토니 오센도프스키에 따르면, 운게른은 우르가에서 질서를 확립하고 거리 청소와 위생과 수도에서의 종교적 생활과 관용을 장려하며 경제 개혁을 시도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이 신생 국가에서 모든 결정권은 기본적으로 [[복드 칸]]에게 있었기 때문에,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몽골의 내정에 거의 간섭하지 않았고 몽골인들에 관한 복드 칸의 주권을 존중하며 조력자로 남았다. 반면 러시아인들은 빨갱이를 색출한다며 가혹하게 대했다. --현실에서 [[크루세이더 킹즈|크킹]] 플레이를 하던-- 운게른슈테른베르크에게는 러시아인 빨갱이들보다 몽골인 왕공족들이 더 동족에 가깝게 느껴졌던 것이다. 러시아 내전기에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명령으로 인해 러시아와 몽골에서 살해된 사람은 총 846명이었다. 이 중 한국 독립운동가 [[이태준(독립운동가)|이태준]]도 있다. 당시 이태준은 개신교 선교 활동과 의열단에 가입하고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자금 조달 등의 독립운동 중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